
솔직히 저는 영화를 보면서 제 자신이 저렇게까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자 리포트 속 정신과 의사 이영훈을 보는 내내 묘하게 불편했습니다. 무서워서가 아니라, 너무 익숙해서였습니다. 계획을 세우고, 오차 없이 실행하고, 끝나면 서류로 정리하는 그 루틴이 어딘가 낯설지 않았거든요.
탈감각화, 감정이 소거된 기계적 일과의 공포
살인자 리포트의 핵심은 살인 장면보다 살인 이후의 모습에 있습니다. 이영훈은 사람을 죽이고 나서 피해자의 특징과 처리 과정을 서류로 기록합니다. 이 장면이 제게 군대 생활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매일 0630에 일어나 체조, 점호, 일과, 운동을 순서대로 반복하던 그 생활이요. 처음엔 숨이 막히던 루틴이 1년쯤 지나니까 아무렇지 않게 몸이 먼저 움직이더라고요. 이영훈의 모습이 딱 그랬습니다. 살인이 그에게는 그냥 일과 중 하나였던 겁니다.
여기서 심리학에서 말하는 탈감각화(Desensitization)가 작동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탈감각화란 반복된 자극에 노출되면서 처음에 느꼈던 강렬한 감정 반응이 점점 무뎌지는 현상을 말합니다. 군인이든 의료진이든 반복된 환경 속에 놓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험하는 기제입니다. 문제는 이 탈감각화가 극단으로 흐를 때 인간성의 경계를 흐린다는 점입니다.
제가 직접 겪어보니 이건 군대만의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회사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집니다. 반복된 업무 루틴 속에서 어느 순간 저 자신이 일 잘하는 기계처럼 굴러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회사원이든 군인이든 집단 속에서 주관적으로 행동하기 어려운 환경에 놓인 사람이라면, 이영훈의 그 기계적인 움직임에서 자신의 단면을 발견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인지부조화, 정신과 의사라는 직업 뒤에 숨겨진 이면
영화 속에서 이영훈은 단순한 살인자가 아닙니다. 정신과 전문의(Psychiatrist)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정신과 전문의란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 과정을 마치고 정신 질환의 진단과 치료를 담당하는 의사를 뜻합니다. 단순 상담을 넘어 약물 처방과 심층 심리 분석까지 다루는 직군입니다. 영화는 바로 이 직업적 역량을 살인에 연결시킵니다.
인터뷰 장면에서 이영훈은 기자 백선주의 동공 확장, 맥박 변화, 입술 끝의 미세한 긴장을 읽어내며 거짓말을 간파합니다. 이건 영화적 과장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기법입니다. 이를 비언어적 행동 분석(Nonverbal Behavior Analysis)이라고 부르는데, 비언어적 행동 분석이란 표정, 자세, 눈빛, 생리 반응 등을 통해 상대방의 심리 상태나 거짓 여부를 추론하는 기법입니다. 실제로 미국 FBI나 CIA에서 심문 기법 중 하나로 활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출처: FBI 공식 사이트).
저는 MBTI가 ESTJ라 그런지, 사람과 대화할 때 상대방의 표정이나 말투에서 감정을 읽으려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영훈처럼 그걸 도구로 쓰기 시작하면 어디서 선이 그어져야 하는지 모호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분석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분석을 상대를 통제하는 데 쓰느냐 이해하는 데 쓰느냐의 차이가 결국 이영훈과 저의 차이겠죠.
이 영화가 색다르게 와닿은 이유 중 하나는 직업의 선망 때문이기도 합니다. 의사는 일반적으로 사회에서 신뢰와 존경을 받는 직업으로 분류됩니다. 실제로 한국직업능력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의사는 사회적 위신도와 신뢰도에서 꾸준히 상위 직업군에 포함됩니다(출처: 한국직업능력연구원). 그런데 그 선망받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연쇄 살인마라는 설정 자체가 관객의 인지 부조화(Cognitive Dissonance)를 유발합니다. 인지 부조화란 서로 모순되는 믿음이나 정보가 동시에 존재할 때 발생하는 심리적 불편감을 말합니다.
자기성찰 : 내 성격, 어디까지가 괜찮은 걸까
저 자신도 어느 정도 완벽주의 성향이 있다는 걸 압니다. 여행을 가도 일정표를 짜고, 요리를 할 때도 순서를 정해두고,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상황을 극도로 불편해합니다. 이런 성격이 업무에서는 꽤 유효하게 작동하는 편이어서 회사에서 어느 정도 인정받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는데, 이영훈을 보면서 그 완벽주의의 그늘이 얼마나 깊을 수 있는지를 처음으로 직면하게 됐습니다.
완벽주의 성격이 가져오는 양면성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업무 효율이 높아지고 실수율이 줄어드는 긍정적 효과가 있습니다.
- 반면 가까운 사람에게 무관심하거나 차갑게 보일 수 있는 부작용이 따라옵니다.
- 통제 욕구가 강해질수록 타인의 실수나 비효율을 용납하기 어려워집니다.
- 극단적으로 흐를 경우, 자신의 기준을 타인에게도 강요하는 방식으로 발현됩니다.
제 경험상 이건 성격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그 성격이 어느 방향을 향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이영훈은 그 완벽주의를 살인을 정당화하는 치료 행위의 틀로 썼습니다. 저는 그 에너지를 이직 준비와 자기 계발에 쓰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가족이나 여자친구에게 무심하게 굴지 않도록, 예전보다는 의식적으로 대화를 더 많이 하려는 노력도 병행 중입니다.
이영훈처럼 되지 않는 전제 하나는 단순합니다. 완벽주의가 나 자신을 위한 것이어야지, 타인을 통제하거나 판단하는 도구가 되어선 안 된다는 겁니다.
살인자 리포트는 단순한 범죄 스릴러가 아닙니다. 보고 나면 묘하게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만드는 영화입니다. 완벽주의 성향이 있다면, 혹은 반복된 루틴 속에서 스스로가 기계처럼 굴러간다는 느낌을 받아본 적 있다면 한 번쯤 직접 보시길 권합니다. 불편한 거울 앞에 서는 경험이 될 수 있습니다. 그 불편함이 오히려 자신을 점검하는 계기가 될 수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