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전협정이 체결된 그날 밤 10시까지도 총성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2011년 개봉한 장훈 감독의 영화 고지전은 바로 그 사실, 즉 '종전'이 아닌 '정전'으로 끝난 전쟁의 비극을 가장 집요하게 파고든 작품입니다.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저는 한동안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화면을 멍하니 바라봤습니다.
영화 <고지전> 애록고지, 하루에도 몇 번씩 주인이 바뀌는 땅
영화의 배경인 애록고지는 실제 전장인 백마고지와 화살머리고지를 모티브로 만들어진 가상의 장소입니다. 이 두 고지는 강원도 평강, 금화, 철원을 잇는 이른바 철의 삼각지대(Iron Triangle)를 구성하는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여기서 철의 삼각지대란 중부전선 장악을 위해 남북 양측 모두가 반드시 확보해야 했던 지리적 삼각형 지역을 말합니다. 최적의 방어 지형을 갖추고 있어 북한군은 이곳을 대한민국 공격의 전진 기지로 삼았고, 결국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 지역은 남북이 양분한 채로 남겨졌습니다(출처: 국가보훈부).
제가 직장 생활을 하던 10년 동안, 거대한 조직 안에서 명령에 따라 움직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 일이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인가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애록고지를 두고 하루에도 몇 번씩 뺏고 뺏기는 장면을 보면서 그 감각이 되살아났습니다. 어제 목숨을 걸고 빼앗은 고지가 오늘 아침이면 다시 적의 손에 넘어가는 현실, 그 반복 속에서 인물들의 눈빛이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영화는 집요하게 포착합니다.
고지전이 다른 한국 전쟁 영화와 확연히 구별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승리나 희생을 미화하는 대신, 반복되는 공방 그 자체가 주는 피로감을 관객에게 고스란히 체험시킵니다. 중반부가 다소 지루하게 느껴진다는 비평도 있지만, 제 경험상 그 지루함이야말로 이 영화가 의도한 것이라고 봅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소모전의 감각을 화면 밖으로 꺼내는 방식으로서는 오히려 탁월한 선택이었습니다.
방첩대 수사와 인간이 괴물이 되는 과정
영화의 도입부에서 방첩대(Counter Intelligence Corps) 소속 강은표 중위가 애록고지에 파견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여기서 방첩대란 6.25 전쟁 당시 남한 내 간첩 활동을 감시하고, 군부대는 물론 민간인에 대한 사찰과 수사까지 담당했던 군사 정보 기관입니다. 수사 권한이 군 내부를 넘어 민간으로까지 확장되어 있었던 만큼, 그 존재 자체가 전쟁이 낳은 공포의 산물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강은표는 처음에 아군 부대 내 내통자를 색출하기 위해 파견된 인물입니다. 그런데 직접 겪어보니 예상과는 전혀 다른 광경이 펼쳐집니다. 그곳에서 그가 목격한 것은 아군과 적군이 술을 나누고 편지를 주고받는 기묘한 공존의 풍경이었습니다. 적과 아군의 경계가 무너진 그 장면이 저에게는 가장 충격적이었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이분법적인 전쟁 서사에 익숙해져 있던 제 눈에 그 장면은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질문처럼 보였습니다. "우리는 왜 싸우는가?"
이 영화가 명작으로 손꼽히는 이유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남북 이분법이 아닌 '전쟁이 만든 인간'에 집중한 시나리오
- 방첩대 수사라는 장치를 통해 전쟁의 내부 모순을 드러내는 구조
- 신하균, 고수 두 배우의 극과 극 연기 대결이 만들어내는 몰입감
- 모르핀(마약성 진통제) 장면 등을 통해 전장의 무감각함을 시각화한 디테일
- 휴전협정 이후에도 멈추지 않는 전투라는 역사적 사실을 극적으로 형상화
신하균 배우가 연기한 김수혁 중위의 변화가 특히 오래 남았습니다. 전쟁 초기의 순수함을 잃고 냉혈한으로 변해가는 과정이 설득력 있게 그려졌습니다. 저 역시 오랜 조직 생활을 거치며 처음 품었던 이상과 열정이 환경에 의해 서서히 마모되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기 때문에, 그 캐릭터의 변화가 단순한 영화적 장치로 읽히지 않았습니다. 전쟁이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이지, 그가 처음부터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 그 차이를 영화는 끝까지 놓치지 않습니다.
휴전협정 그 이후, 마지막 10분이 남기는 것
1953년 7월 27일 체결된 정전협정(Armistice Agreement)은 밤 10시부터 효력을 발생했습니다. 여기서 정전협정이란 전쟁을 완전히 종결하는 평화조약이 아니라, 전투 행위를 일시 중지하는 군사적 합의를 의미합니다. 즉 대한민국은 지금도 법적으로는 전쟁이 끝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 12시간의 공백 동안, 일부 부대에서는 조금이라도 더 많은 영토를 확보하기 위한 마지막 공격이 실제로 감행되었습니다(출처: 국가기록원).
영화의 마지막 전투 장면은 바로 그 역사적 사실 위에 놓여 있습니다. 협정서에 사인이 끝났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총을 내려놓지 못하는 인물들, 그리고 결국 모두가 쓰러지는 장면은 이 영화의 백미입니다.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보통의 전쟁 영화는 마지막에 살아남은 누군가의 생존으로 희망을 남기지만, 고지전은 그 희망마저 허락하지 않습니다. 살아남은 강은표가 허무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서 있는 마지막 장면은 어떤 웅장한 음악보다 더 오래 울립니다.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자면 후반부의 감정 밀도가 지나치게 높아 심리적 피로도가 상당하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너무 잔인하게 몰아붙인다는 느낌도 분명 있습니다. 하지만 그 불편함이 곧 전쟁의 실체라는 역설, 그것이 고지전을 한국 전쟁 영화의 정점에 세우는 이유입니다.
고지전은 결국 "오늘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평화가 어떻게 왔는가"를 가장 불편한 방식으로 묻는 영화입니다. 6월이 되면, 혹은 전쟁 영화 한 편 제대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이 작품을 권합니다. 다만 가볍게 볼 작품이 아니라는 것만은 미리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보고 나서 한동안은 그 무게가 남아 있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