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한테 이상한 이야기를 자주 들은 아이가 있다면, 그 이야기를 믿어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을 때 어떤 기분일지 상상이 가시나요? 저는 <미스 페레그린과 이상한 아이들의 집>을 처음 봤을 때 제이크가 정신이 이상한 아이 취급을 받는 초반 장면에서 괜히 심장이 쿵 내려앉았습니다. 팀 버튼 감독이 2016년에 내놓은 이 작품, 한 번 보고 나면 오래도록 머릿속에서 지워지지가 않습니다.
1943년의 루프, 보호라는 이름의 시간 창살
영화에서 가장 먼저 마음을 사로잡은 건 '루프(Loop)'라는 개념이었습니다. 루프란 특정한 날 하루를 무한 반복시키는 시간의 고리를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1943년 9월 3일, 독일군의 폭격이 떨어지기 직전 순간을 매일 초기화해서 아이들이 그 시간 안에 영원히 머물게 만드는 장치입니다.
처음엔 저도 "아, 위험한 세상으로부터 아이들을 지키는 따뜻한 보호막이구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영화를 따라가다 보니 슬슬 불편한 감각이 올라왔습니다. 아이들은 성장하지 않습니다. 매일 똑같은 아침을 맞고, 똑같은 점심을 먹고, 똑같은 하이라이팅 의식으로 루프를 재설정합니다. 미스 페레그린(에바 그린 분)은 언제나 새로운 모습으로 아이들의 주체성을 차단하면서 자신이 설계한 시간 틀 안에 그들을 묶어 두고 있었죠.
제가 직접 이 장면들을 곱씹어 봤을 때, 루프는 결국 외부 위협을 이유로 구성원을 영원히 격리 상태로 유지하는 집단 통제 카르텔의 은유처럼 느껴졌습니다. 팀 버튼 감독이 이를 아름다운 고딕 미장센으로 포장했기 때문에 더 섬뜩했습니다. 아이들이 웃고 뛰노는 장면 뒤에는 늘 '내일도 이 하루만 반복된다'는 차가운 사실이 깔려 있으니까요.
- 루프: 특정 날 하루를 무한 반복시키는 시간 장치. 이 영화에서는 1943년 9월 3일이 기준점
- 별난 아이들(Peculiars): 공중 부양, 발화, 괴력 등 특수 능력을 가진 아이들로, 평범한 세계에서 박해를 피해 루프 안에 숨어 삶
- 루프 재설정: 미스 페레그린이 새로 변신하며 매일 같은 날을 되돌리는 의식. 이것이 멈추면 루프는 닫힘
할로게스트와 바론, 영생 탐욕이 낳은 식인의 리얼리티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영화 포스터와 예고편만 보면 동화적인 분위기가 전부인 줄 알았는데, 막상 할로게스트(Hollowgast)가 등장하는 장면은 꽤 날 것의 가학성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할로게스트란 오래전 루프 안에 갇혀 살던 별종(Peculiar)들이 불사의 영생을 얻으려 무모한 실험을 감행한 결과, 부작용으로 형체가 흉측하게 변해버린 존재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인간의 모습을 되찾기 위해 별난 아이들의 눈알을 먹어야 했고, 그 욕망이 영화 전체의 잔혹한 엔진이 됩니다. 리더인 바론(새뮤얼 L. 잭슨 분)은 화려하고 기괴한 외형 뒤에 그 탐욕을 완벽하게 체화한 인물로 등장합니다.
제 경험상 이런 유형의 빌런은 단순히 '나쁜 놈'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에 정교한 명분을 부여하는 경우가 훨씬 더 소름 돋습니다. 바론도 마찬가지입니다. 진화와 영생이라는 그럴듯한 언어로 포장한 뒤, 실제로는 어린아이들의 눈을 도륙하는 행위를 정당화합니다. 이 구조가 현실의 어떤 논리와 겹쳐 보이기 시작하면 영화가 단순한 판타지로 읽히지 않게 됩니다.
영화 비평 사이트인 출처: Rotten Tomatoes에서도 이 영화를 "팀 버튼 특유의 다크 미학이 가장 강렬하게 발현된 작품"으로 평가했는데, 저는 그 평가가 바로 이 할로게스트 시퀀스 덕분에 성립한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밝아 보이는 동화적 외피 위에 가장 어두운 탐욕의 리얼리티를 올려놓는 방식, 그게 팀 버튼이 아니면 쉽게 나오지 않는 감각입니다.
팀 버튼 미장센의 정점과, 결말이 남긴 한 가지 아쉬움
블랙풀 유원지 시퀀스는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오래 기억하는 장면입니다. 바론이 제이크로 변신해 아이들을 교란하는 최악의 외통수 상황에서, 제이크는 놀이공원의 눈 폭탄으로 보이지 않는 할로 괴물의 위치를 드러내고 침몰선 오론티아호에서 불러온 해골 군단을 투입해 전세를 뒤집습니다.
여기서 '미장센(Mise-en-scène)'이란 프레임 안에 배치되는 모든 시각 요소, 즉 배우의 위치, 조명, 무대 장치, 색감 등을 종합해 감독이 의도적으로 연출하는 화면 구성 방식을 말합니다. 팀 버튼은 이 시퀀스에서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을 오마주한 해골들의 움직임과 유원지의 화려한 조명을 충돌시켜, 잔혹한 전투를 동화책 한 페이지처럼 보이게 만들었습니다. 제가 직접 여러 번 되감아 봤는데, 볼 때마다 이 장면의 밀도가 새롭게 느껴졌습니다.
다만 솔직하게 말하면, 저는 결말부에서 약간의 아쉬움을 느꼈습니다. 영화 전반부가 루프의 격리 모순과 할로게스트의 잔혹한 탐욕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면, 후반부는 제이크가 루프 지도를 들고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엠마를 찾아가는 낭만적인 방향으로 봉합됩니다. 영화 제작사인 출처: 20th Century Fox(현 20th Century Studios)가 후속편을 염두에 둔 열린 결말을 선택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 과정에서 전반부의 날 선 고독감이 다소 희석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제 경험상, 이 결말이 남기는 감각은 단순한 해피엔딩과는 다릅니다. 1943년을 영원히 살아가는 엠마 곁에서, 2016년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루프들을 유랑하는 삶을 택한 제이크의 선택은 낭만보다 서늘함에 훨씬 가깝습니다. 그 서늘함을 낭만으로 포장해 버린 게 아쉬웠을 뿐, 선택 자체의 무게는 제대로 전달됩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미스 페레그린과 이상한 아이들의 집, 원작 소설이 있나요?
A. 있습니다. 랜섬 리그스(Ransom Riggs)가 2011년에 발표한 동명 소설이 원작입니다. 소설은 빈티지 기괴 사진들을 실제로 수집해 이야기 안에 녹여 넣은 독특한 구성으로 출판 즉시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오른 작품입니다. 영화를 재미있게 보셨다면 소설 쪽도 분위기가 꽤 달라서 읽어볼 만합니다.
Q. 할로게스트가 투명한 이유가 뭔가요?
A. 영화 설정상 할로게스트(Hollowgast)는 루프 실험의 부작용으로 보통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됩니다. 오직 제이크처럼 특별한 시각 능력을 가진 별종만이 그들을 직접 볼 수 있습니다. 이 능력이 제이크가 아이들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되는 핵심 이유이기도 하죠.
Q. 2편은 언제 나오나요?
A. 2025년 현재까지 공식 제작 발표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원작 소설은 3부작으로 완결된 시리즈라 속편 제작을 기다리는 팬들이 여전히 많지만, 스튜디오 측에서 공식 입장을 밝힌 바가 없는 상황입니다. 저도 그 팬 중 한 명이라 아쉽긴 합니다.
Q. 에바 그린이 맡은 미스 페레그린은 어떤 능력을 가진 캐릭터인가요?
A. 미스 페레그린은 '임브라인(Ymbryne)'이라고 불리는 특수한 존재입니다. 임브라인이란 새로 변신할 수 있으면서 동시에 루프를 생성하고 유지하는 능력을 가진 여성 별종을 지칭합니다. 쉽게 말해 루프의 창조자이자 관리자 역할을 담당하는 캐릭터로, 영화 전체의 구조를 지탱하는 핵심 축입니다.
결론
제가 이 영화를 처음 본 뒤 오래 남은 감각은 화려한 비주얼이 아니었습니다. 루프라는 시간 창살 안에 갇혀 성장이 정지된 아이들, 영생을 명분 삼아 눈알을 도륙하는 할로게스트의 탐욕,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뚫고 자신이 믿는 선택 하나만을 붙잡는 제이크의 서늘한 결말. 이 세 겹의 층위가 한꺼번에 얹혀 있는 영화를 만나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습니다.
아직 못 보신 분들이라면, 팀 버튼 감독 특유의 고딕 미장센과 에바 그린의 압도적인 안광만으로도 충분히 시간이 아깝지 않습니다. 원작 소설 3부작까지 이어서 읽어보시는 것도 이 세계관을 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