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직장에서 부당한 지시를 받고도 "뭐, 어쩌겠어"라며 억지 미소를 지어본 적 있으신가요? 영화 베테랑을 다시 꺼내 든 건 바로 그 감각 때문이었습니다. 2015년 개봉 당시 천만 관객을 돌파하며 그해 한국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한 이 영화는, 시간이 지나도 현실의 어딘가를 정확히 찌르는 작품입니다.
영화 <베테랑> 계급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괴물, 조태오
영화에서 가장 먼저 물음표를 던지게 되는 장면이 있습니다. 재벌 3세 조태오(유아인 분)가 체불 임금을 요구하러 온 배 기사(정웅인 분)에게 글러브를 쥐여주고 그 자식이 보는 앞에서 폭행하는 장면입니다. 저는 처음 이 장면을 봤을 때 손이 덜덜 떨렸습니다. 어이가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익숙한 구도였기 때문입니다. 돈을 가진 쪽이 요구하고, 돈이 필요한 쪽이 버텨야 하는 관계. 조태오는 단순히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소시오패스적 행동을 아무런 제재 없이 반복할 수 있는 환경 자체가 만들어낸 결과물입니다.
여기서 소시오패스(Sociopath)란 반사회적 성격장애의 일종으로,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이 결여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조태오는 배 기사를 맞춘 뒤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맷값으로 수표를 건넵니다. 그 장면이 소름 끼치는 이유는 폭력 자체보다, 그 태연함이 오랜 면죄부 위에서 형성된 것임을 관객 모두 알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의 모티브가 된 실제 사건이 있습니다. SK그룹 최태원 회장의 사촌동생이 직원을 폭행하고 합의금을 건넸다는 사건인데, 그 금액이 불과 2천만 원이었습니다. 한국의 재벌 구조 아래서 법적 책임보다 금전 합의가 우선시되는 현실은, 영화 속 허구가 아니라 사회 구조적 문제입니다. 실제로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의 연구에 따르면, 경제력에 따른 형사 처벌의 불균형이 국민의 사법 불신을 심화시키는 주요 요인 중 하나로 지목되고 있습니다(출처: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조태오라는 캐릭터가 유독 오래 기억에 남는 이유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악의 동기가 탐욕이나 복수가 아닌, 단순한 '무관심과 우월감'에서 비롯된다는 점
- 법적 대응보다 돈으로 무마하는 과정이 현실과 너무 흡사하게 묘사된다는 점
- 배다른 형제들과의 경영권 다툼이라는 내부 열등감이 외부로 향한 폭력성으로 표출된다는 점
유아인이라는 배우를 이 역할에 캐스팅한 감독의 선택도 놀라웠습니다. 기존 이미지를 완전히 뒤집어 새로운 연기 영역을 열었다는 점에서, 이를 캐릭터 전환(Character Transformation)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캐릭터 전환이란 배우가 기존에 쌓아온 대중적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역행하는 역할을 통해 연기 스펙트럼을 확장하는 방식입니다. 저는 당시 유아인의 이 연기를 보며 "이 사람 진짜구나"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납니다.
서도철의 집념, 그리고 우리가 타협했던 순간들
그렇다면 서도철(황정민 분)은 어떤 형사인가요? 그는 천재도 아니고 배경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가 멈추지 않는 이유가 뭔지 생각해보신 적 있으신가요?
광역수사대는 지역 경찰서의 관할을 넘어 여러 지역에 걸친 범죄를 수사하는 특수 조직입니다. 서도철이 속한 이 조직은 중고차 절도 사기단을 소탕하는 것에서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사건은 점점 더 거대한 권력과 충돌하는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조직의 위에서 "적당히 마무리하라"는 압박이 내려올 때, 저는 솔직히 서도철처럼 행동할 수 있을까 자문해봤습니다. 저도 직장 생활을 하면서 거래처 갑질에 "에이, 돈 벌어야지"라며 웃어넘겼던 순간들이 분명히 있었거든요. 그 기억이 서도철의 장면들과 겹치면서 이상하게 불편해졌습니다.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마약 복용 상태에서 차를 몰며 명동 한복판을 질주하는 조태오와, 이를 맨몸으로 막아서는 서도철의 대결입니다. 이 장면에서 제가 주목한 건 주먹질보다 주변 시민들의 반응입니다. 아무도 그냥 지나치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스마트폰을 들어 촬영하고, 누군가는 소리를 지르며 목격자가 됩니다. 이는 공론화(Public Disclosure) 효과를 시각적으로 구현한 연출입니다. 공론화란 사회적으로 은폐되거나 묵인된 사건이 대중의 시선에 노출되며 공적 책임을 묻게 되는 과정을 뜻합니다. 조태오의 권력이 어둠 속에서는 견고했지만, 수백 명의 카메라 앞에서는 순식간에 무너집니다.
5일 동안의 밤샘 촬영 끝에 영화 본편에는 1분 남짓만 담긴 이 마지막 격투 장면은, 황정민과 유아인 두 배우가 리얼 액션(Real Action) 방식으로 소화했습니다. 리얼 액션이란 대역 없이 배우 본인이 직접 동작을 수행하는 촬영 방식으로, 관객이 화면에서 느끼는 긴박함과 체감 강도가 확연히 달라집니다. 제가 영화관에서 이 장면을 볼 때 등받이에서 몸이 저절로 앞으로 쏠렸던 건 그 이유 때문이었을 겁니다.
베테랑이 2015년 관객 수 1위를 기록하며 당시 역대 한국 영화 흥행 순위 5위권에 진입한 것은 단순히 재미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영화진흥위원회(KOFIC)의 통계에 따르면, 사회적 불평등을 소재로 한 한국 상업영화들은 2010년대 중반 이후 꾸준히 높은 흥행 성적을 기록해왔습니다(출처: 영화진흥위원회). 관객들이 서도철에게 열광했던 건 그가 강해서가 아니라, 그 부조리 앞에서 타협하지 않았기 때문일 겁니다.
베테랑은 단순한 형사 액션 영화가 아닙니다. 저는 이 영화를 다시 볼 때마다 "나는 어느 쪽에 가깝게 살고 있나"라는 질문이 먼저 떠오릅니다. 서도철처럼 살기는 어렵더라도, 적어도 불의 앞에서 카메라를 드는 시민들 중 한 명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아직 이 영화를 보지 않으셨다면, 지금 보셔도 전혀 늦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