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개봉한 영화 <아쿠아맨>은 전 세계 박스오피스에서 10억 달러를 돌파한 DCEU 최초의 작품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단순한 히어로물이 아니라는 직감이 들었습니다. 지상과 바다 사이에서 어느 쪽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하는 아서 커리의 얼굴에서, 체제가 만들어낸 프레임 안에 갇혀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아볼 수밖에 없는 표정이 있었거든요.
혈통 카르텔 — 순혈주의라는 이름의 가스라이팅
아서 커리는 태어날 때부터 두 세계 어느 쪽에서도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스토니브룩 등대지기인 아버지 토마스와 아틀란티스 여왕 아틀라나 사이에서 혼혈로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지상에서는 이방인이었고 수중 왕국에서는 결함 있는 존재로 낙인찍혔죠.
이 설정이 그냥 서사적 장치로 소비되는 데 그쳤다면 저도 이렇게까지 몰입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옴 왕(패트릭 윌슨 분)의 '오션 마스터(Ocean Master)' 계획을 들여다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오션 마스터란 아틀란티스를 포함한 바다 7개 왕국 전체를 통합 지배하는 최고 군주 자리를 의미합니다. 옴은 이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지상인이 바다를 오염시킨다'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제가 직접 서사를 따라가 보니 그 명분은 처음부터 정복 전쟁의 정당화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순혈주의(Pureblood Ideology)라는 개념이 여기서 핵심입니다. 순혈주의란 특정 혈통이나 집단의 순수성을 절대 가치로 내세워 타자를 배제하고 지배를 정당화하는 이념 구조를 말합니다. 옴의 논리가 정확히 그렇습니다. "나는 순혈 아틀란티스인이고 너는 반쪽짜리"라는 프레임으로 아서를 무력화하려 하죠. 제가 경험상 이런 구조를 가장 경계하는 이유는, 가장 촘촘한 감옥이 항상 '고귀한 명분'으로 포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틀라나 여왕(니콜 키드먼 분)이 아들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아틀란티스로 돌아간 선택, 그리고 토마스가 매일 등대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기다린 세월. 이 두 장면이 교차될 때, 저는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영웅 탄생 서사인 줄 알았는데 실은 배제당한 사람들의 버팀 이야기였거든요.
- 옴 왕의 오션 마스터 야욕: '지상 오염'이라는 명분 뒤에 숨겨진 순혈 정복 의지
- 혼혈 단독자 아서: 두 세계 모두에서 배제된 존재이기에 오히려 어느 쪽 프레임에도 포획되지 않음
- 아틀라나의 귀환 선택: 개인의 희생이 아니라 가족이라는 본질을 사수하기 위한 주체적 결단
트렌치 심연 — 빛 한 점 없는 곳에서 증명하는 자격
트렌치(Trench) 시퀀스는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 장면입니다. 붉은 조명탄 하나에 의지한 채 수천 마리의 변종 괴수 떼가 들이닥치는 그 절체절명의 상황은, 제임스 완 감독이 공포 영화 연출로 갈고닦은 미장센(Mise-en-scène) 감각이 블록버스터 스펙터클과 충돌하는 지점에서 탄생한 장면입니다. 미장센이란 카메라 앵글, 조명, 배우의 동선 등 화면 구성 요소 전체를 통합적으로 설계하는 연출 방식을 말합니다.
제임스 완은 <쏘우>, <컨저링> 시리즈로 공포 장르의 정점을 찍은 감독입니다. 그 감각이 트렌치 장면에서 그대로 발화합니다. 거대한 예산의 DCEU 영화 안에 한 편의 크리처 호러를 통째로 집어넣은 것이죠. 크리처 호러(Creature Horror)란 괴생명체의 위협과 공포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장르를 뜻하는데, 트렌치 시퀀스는 이 장르의 문법을 해양 액션 블록버스터 안에 기묘하게 이식해 냈습니다. 솔직히 처음 보는 조합이라 당황했습니다.
이 장면이 단순한 시각적 스펙터클로 머물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어머니 아틀라나가 바쳐졌던 바로 그 심연으로 아서와 메라(앰버 허드 분)가 스스로 뛰어드는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영화를 보며 주목한 것은 아서가 두려워했느냐가 아니라, 두려운 줄 알면서도 뛰어들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자격은 환경이 증명해 주는 게 아니라, 그 환경 안에서 내가 무엇을 선택하느냐로 증명됩니다.
영화 미학 연구 측면에서도 이 시퀀스는 주목받았습니다. 제임스 완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트렌치 장면을 "아서가 왕으로서의 두려움을 직접 통과하는 통과의례"로 설계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출처: DC Comics 공식 사이트).
삼지창 결전 — 전설의 무기가 아니라 선택의 무게
아틀란티스 초대 왕 아틀란의 삼지창(The Trident of Atlan)을 손에 넣는 장면에서, 많은 분들이 "이 무기 하나로 너무 쉽게 끝나버린다"는 인상을 받으셨을 겁니다. 저도 처음에는 그랬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보고 나서야 이 장면이 뭘 말하려는지 조금 달리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전설의 아틀란 삼지창은 단순한 강력한 무기가 아닙니다. 이 신물(神物)은 바다의 모든 생명체와 교감하고 자연의 힘을 통제하는 권능을 담은 상징적 물건입니다. 서사 구조적으로는 맥거핀(MacGuffin)의 역할을 하면서도, 동시에 아서가 진정한 단독자(Singular Individual)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매개체로 기능합니다. 맥거핀이란 이야기를 추동하는 목표 물건이지만 그 자체보다 그것을 향한 캐릭터의 여정이 핵심인 서사 장치를 뜻합니다.
제가 직접 서사를 추적해보니, 클라이맥스의 진짜 무게는 삼지창을 손에 넣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아서가 옴을 죽이지 않는 선택을 한다는 데 있었습니다. 폭군을 처단해 왕좌에 오르는 가장 쉬운 길을 두고, 옴을 살려둔 채 어머니와의 재회를 선사하는 방식으로 전쟁을 끝냅니다. 이 장면에서 아서가 체제의 논리가 아닌 자신의 판단으로 결말을 선택했다는 점이, 저의 비평적 관점에서 이 영화가 단순한 오락 블록버스터를 넘어서는 지점입니다.
물론 한계도 있습니다. 전반부에서 묵직하게 쌓아 올린 혼혈 단독자의 소외감과 환경 오염 문제가, 삼지창 획득 이후 바다 전체가 순식간에 복종하는 장면에서 다소 편의적으로 봉합되는 느낌은 지울 수 없습니다. 수 세기의 정치적 대립이 한 번의 결투로 정리된다는 설정은 서사적 후퇴입니다. 그럼에도 제 경험상 이 영화는 DCEU가 내놓은 작품 중 개별 캐릭터의 주체성이 가장 선명하게 그려진 편에 속합니다(출처: Rotten Tomatoes, 아쿠아맨 2018).
자주 묻는 질문
Q. 아쿠아맨 1편을 안 보고 로스트 킹덤을 봐도 괜찮을까요?
A.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1편을 먼저 보시는 걸 권합니다. 아서 커리가 혼혈 단독자로서 겪는 정체성 갈등과 옴 왕과의 대립 구조가 2편의 감정선 전반에 깔려 있어서, 1편의 맥락 없이는 캐릭터들의 관계가 평면적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제가 직접 순서 없이 DC 영화들을 섞어 본 적이 있는데, 역시 정석 순서가 몰입도 면에서 확실히 달랐습니다.
Q. 제이슨 모모아가 아쿠아맨 역할에 잘 맞는 편인가요?
A. 저는 제이슨 모모아가 이 역할에 거의 완벽하게 맞는다고 봅니다. 기존 아쿠아맨의 금발 왕자 이미지를 완전히 해체하고 하드보일드한 피지컬 바디 텐션과 서늘한 안광으로 채운 캐스팅은, 결과적으로 캐릭터에 훨씬 강한 단독자 서사를 부여했습니다. 혼혈 배우가 혼혈 캐릭터를 연기한다는 점도 서사 밀도에 기여하는 요소입니다.
Q. 트렌치 시퀀스가 공포스럽다고 하는데 정말 무서운 수준인가요?
A. 공포 영화처럼 무서운 수준은 아닙니다만, 제가 직접 보면서 예상보다 훨씬 압박감이 강했습니다. 제임스 완 감독 특유의 공간 연출과 어둠 속에서 쏟아지는 크리처 떼의 조합이 긴장감을 꽤 끌어올립니다. 공포 장르에 익숙한 분이라면 오히려 이 시퀀스가 반가울 수도 있습니다.
Q. 아쿠아맨은 어린이도 볼 수 있는 영화인가요?
A. 국내 기준 12세 관람가 등급입니다. 전체적인 톤은 가족 블록버스터에 가깝지만, 트렌치 시퀀스의 크리처 공포 연출과 일부 전투 장면은 어린 연령대에게 다소 강렬할 수 있습니다. 초등 저학년보다는 고학년 이상에게 권합니다.
결론
영화 <아쿠아맨>은 히어로 장르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제가 보기에 본질은 혈통이라는 프레임에 갇히지 않으려는 단독자의 버팀 이야기입니다. 제임스 완이 구축한 수중 비주얼 스펙터클과 미장센은 분명 장르 영화가 도달할 수 있는 미학적 정점에 가깝습니다. 동시에 후반부의 편의적 봉합이라는 한계도 솔직히 존재합니다.
하지만 그 한계에도 불구하고, 모든 전쟁이 끝난 뒤 수면 위로 뛰어올라 삼지창을 거머쥐고 서 있는 아서 커리의 실루엣은 오래 남습니다. 체제가 아닌 자신의 판단으로 결말을 선택한 사람의 얼굴이 그렇습니다. 2편 <아쿠아맨: 로스트 킹덤>을 보기 전, 1편의 이 맥락을 다시 짚어두시면 훨씬 선명하게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