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웃음이 용기라는 말, 한 번쯤 들어봤을 겁니다. 그런데 저는 그 말이 사실은 굉장히 폭력적인 요구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2019년 개봉한 토드 필립스 감독의 영화 조커는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합니다. 참고 참다 미쳐버린 한 인간의 이야기인데, 솔직히 처음 봤을 때 등골이 서늘했습니다. 공감이 됐기 때문입니다.
영화 <조커> 고담시 기득권이 아서를 만든 방식
아서 플렉은 처음부터 괴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사회가 간신히 붙잡아 두던 사람이었습니다. 정신과 상담과 약물 처방, 즉 최소한의 복지 시스템이 그를 일상 안에 붙들어 두고 있었죠. 그런데 고담시 당국이 복지 예산을 삭감하면서 그 줄이 한 번에 끊겼습니다.
여기서 사회적 안전망이란 개념이 중요합니다. 사회적 안전망이란 실업, 질병, 빈곤 등 개인이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위기 상황에서 국가나 공공기관이 최소한의 생존을 보장해 주는 제도적 장치를 말합니다. 미국 내 정신 건강 서비스 접근성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저소득층의 정신과 치료 중단율은 고소득층보다 3배 이상 높다고 알려져 있습니다(출처: 미국 국립정신건강연구소). 아서의 이야기가 픽션처럼 느껴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토마스 웨인으로 대변되는 자본 계급은 겉으로 고담의 구원자를 자처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아서 같은 아웃사이더들을 '스스로 노력하지 않는 실패자'라는 프레임에 가두고 지워버립니다. 저도 어떤 조직의 부조리한 구조를 마주했을 때 비슷한 감각을 느꼈습니다. 시스템이 주입한 규칙이 공정한 척 포장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특정 계층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 설계되어 있다는 것을요. 영화는 이 위선을 오프닝 뉴스 한 장면으로 압축해 냅니다. 빈민가를 뒤덮은 쓰레기와 쥐 떼 뉴스가 흘러나오는 동안 화면을 채우는 건 광대 분장을 한 아서의 얼굴입니다. 그 얼굴이 이 영화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영화 속 언론의 태도도 주목할 만합니다. 시위대의 목소리는 단 한 번도 제대로 대변되지 않고, 토마스 웨인의 출마 선언을 홍보하는 재료로만 쓰입니다. 아서의 엄마가 웨인을 좋은 시장감이라고 말할 때, 아서가 "다들 그래요? 누구랑 얘기해봤는데요?"라고 묻는 장면은 짧지만 잔인합니다. 기득권 언론의 서사를 무비판적으로 흡수하는 빈곤층의 모습이 그 한 줄에 다 담겨 있으니까요.
아서의 붕괴, 어디서부터 무너졌나
아서가 조커로 변하는 과정을 단순히 '나쁜 사람이 되는 이야기'로 보면 이 영화의 절반도 이해하지 못하는 겁니다. 저는 그 과정이 오히려 어떤 당연한 귀결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불편했고요.
영화에서 아서의 심리 변화를 추적할 때 반드시 짚어야 할 장치가 있습니다.
- 빛과 어둠의 교차: 화면이 깜빡이는 장면은 아서가 결정적 전환점을 맞이하는 순간마다 등장합니다. 첫 살인 직전, 출생의 비밀을 알기 직전, 머레이 쇼 출연 전. 이 조명의 깜빡임은 미장센(mise-en-scène), 즉 화면에 배치된 모든 시각 요소를 통해 인물의 심리 상태를 표현하는 연출 기법으로, 아서의 정신이 붕괴 직전 진동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 춤의 의미: 아서가 춤을 출 때마다 사건이 발생합니다. 집단 폭행 후, 살인 후, 계단을 내려오며. 저는 이 춤이 기쁨이 아니라 고통의 방출이라고 봅니다. 웃어야만 했던 사람이 웃음의 제어권을 잃었을 때 몸으로 흘러나오는 잔여 감정 같은 것이죠.
- 비상구 표시: 아서가 중요한 선택을 앞둔 장면마다 화면 어딘가에 비상구 표시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출구들은 실제 탈출구가 아닙니다. 반대편에서 나오는 문이거나, 이쪽에서 저쪽으로 이어지지 않는 구조입니다. 멈출 수 있는 순간은 있었지만 그는 계속 나아갔습니다.
아서에게는 아버지처럼 여겼던 세 사람이 있었습니다. 동료 랜들, TV 쇼 진행자 머레이, 그리고 토마스 웨인. 셋 모두 결국 그를 배신하거나 부정했습니다. 랜들은 "너를 아들처럼 생각한다"고 말해놓고 총 때문에 문제가 생기자 뒤통수를 쳤고, 머레이는 아서의 스탠딩 코미디를 방송에서 공개 조롱했으며, 토마스 웨인은 그를 망상에 빠진 여자의 아들이라며 일축했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종류의 배신이 사람에게 남기는 상처는 단순한 분노가 아닙니다. 자신이 품었던 인정 욕구 자체가 수치로 돌변하는 감각입니다. 아서가 머레이를 향해 "내 인생이 비극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코미디였다"고 말할 때, 그건 관객을 향한 선언이기도 합니다.
인격분열적 서사 구조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인격분열적 서사란 화자의 현실 인식과 실제 현실 사이의 간극이 점점 벌어지며 독자나 관객이 무엇이 진짜인지 판단하기 어려워지는 서술 방식을 말합니다. 소피와의 관계가 전부 아서의 망상이었다는 것, 그리고 시계가 작중 일관되지 않게 등장한다는 것은 이 영화가 어디까지가 현실인지를 의도적으로 열어두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저는 이 모호함이 결함이 아니라 설계라고 생각합니다. 아서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게 만드는 장치이니까요.
폭력의 낭만화, 이 영화가 남긴 딜레마
조커는 베니스 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며 코믹스 기반 영화의 가능성을 완전히 새로 썼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출처: 베니스국제영화제). 호아킨 피닉스의 신체 연기는 지금도 회자될 만큼 압도적이었고, 힐두르 구드나도티르의 첼로 중심 사운드트랙은 극의 압박감을 내장 깊은 곳까지 밀어 넣었습니다. 제가 처음 극장에서 봤을 때, 상영이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나기가 어려웠던 기억이 납니다. 그 정도로 물리적인 무게감이 있는 영화였습니다.
그런데 냉정하게 서사를 해체해 보면, 이 영화는 분명한 딜레마를 안고 있습니다. 전반부는 계급 격차와 정신 질환이라는 구조적 모순을 날카롭게 파고듭니다. 그런데 후반부에 이르면 아서의 사적 복수가 고담시 전체의 폭동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다소 편리하게 처리됩니다. 개연성보다는 연출적 스펙터클이 앞섭니다. 근본적인 시스템 해체 대신, 모든 것을 불태우는 폭력의 미학화로 결말을 봉합하는 방식은 아쉬운 부분입니다.
저는 유불리를 계산하며 적당히 타협하거나 권위에 눌려 순종하는 방식을 그다지 좋게 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폭력적 돌파를 낭만화하는 시각에도 쉽게 동의하지 못합니다. 조커가 경찰차 위에서 피 묻은 얼굴로 두 팔을 벌릴 때 느껴지는 카타르시스, 그 감정은 진짜입니다. 그러나 그 감정이 어디서 오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그건 아서의 승리가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오랫동안 참아왔는지를 반증하는 것일 테니까요.
영화가 던지는 진짜 질문은 결국 이겁니다. 우리는 지금 아서의 어느 지점에 서 있습니까?
조커는 단순한 빌런 오리진 스토리가 아닙니다.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 미덕처럼 포장된 사회에서, 그 억압이 어디까지 사람을 밀어붙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힘들 때 힘들다고 말하지 못하고, 기분 나쁠 때 웃어야 했던 경험이 있다면, 이 영화가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그 불편함이 이 영화가 남긴 가장 중요한 메시지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