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9년 개봉 당시 저는 극장에서 캡틴 마블을 보고 나오면서 이상하게 말이 없어졌습니다. 재미없었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었고, 감동받았냐고 물어도 딱 그렇다고 하기가 애매했습니다. 소개팅 자리에서 상대방이 "착하고 괜찮더라"는 말을 들었을 때의 그 묘한 공허함, 딱 그 느낌이었습니다. MCU 최초의 여성 단독 주연 히어로물이라는 무게감과 실제 영화가 안겨준 인상 사이의 간극이 생각보다 꽤 컸습니다.
90년대 레트로 미장센, 그 화려한 외피 안에서 삐걱거린 오리진 서사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블록버스터 영화치고 90년대 그런지 사운드트랙을 이렇게 영리하게 쓴 경우가 흔치 않거든요. 너바나와 TLC가 흘러나오는 순간마다 제가 어릴 때 비디오 가게 앞을 기웃거리던 기억이 겹쳐서 꽤나 반가웠습니다. 애나 보든과 라이언 플렉 감독이 구성한 레트로 미장센(mise-en-scène)은 분명 이 영화의 가장 빛나는 성취였습니다. 여기서 미장센이란 카메라 앵글, 조명, 소품, 배경 등 화면 안에 담기는 모든 시각 요소를 의도적으로 배치하는 연출 기법을 가리킵니다. 블록버스터에서 이 정도 레트로 감각을 살려낸 건 흔치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감각적인 외피가 서사의 허술함을 오히려 도드라지게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제가 직접 봐봤는데, 영화 전반부는 크리족(Kree)의 세뇌와 기억 조작이라는 설정을 꽤 날카롭게 밀어붙입니다. 크리족은 마블 코믹스에 등장하는 우주 제국 종족으로, 고도로 발달한 군사력과 유전공학 기술로 은하계를 지배하려는 집단입니다. 캐럴 댄버스(브리 라슨 분)가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모른 채 욘-로그(주드 로 분)의 지시 아래 감정을 억누르는 장면들은 분명 흥미로운 긴장감을 만들어 냈습니다.
하지만 후반부에 이르러 캐럴이 각성하는 순간부터 영화는 급격히 편안해집니다. 그 편안함이 문제였습니다. 슈프림 인텔리전스(Supreme Intelligence)의 통제를 벗어난 뒤, 그 어떤 실질적인 위기도 겪지 않고 함대 하나를 통째로 쓸어버리는 전개는 카타르시스라기보다는 허탈감에 가까웠습니다. 슈프림 인텔리전스란 크리 제국이 섬기는 인공지능 최고 통치자로, 종족의 모든 지식과 기억을 집약한 존재입니다. 이 압도적인 통제 장치를 허물어뜨리는 과정이 너무 손쉽게 처리되어 버리니, 전반부에서 쌓은 긴장감이 허공에 날아가 버리는 기분이었습니다.
제 경험상 히어로의 각성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넘어지는 과정이 충분히 보여야 합니다. 그게 없으면 결국 관객이 감동이 아니라 설명을 듣는 느낌이 납니다. 실제로 출처: Rotten Tomatoes에서 캡틴 마블의 관객 지수는 평단 점수보다 낮게 나왔는데, 이 괴리가 바로 그 허탈감을 수치로 보여주는 것 같았습니다.
- 90년대 레트로 사운드트랙과 미장센은 영화의 가장 강한 무기였습니다
- 크리족의 기억 조작과 세뇌라는 전반부 설정은 날카로운 서사 긴장감을 만들었습니다
- 슈프림 인텔리전스 각성 이후 후반부는 지나치게 무결점 프레임으로 흘러 전반부의 긴장을 소진시켰습니다
- 닉 퓨리(새뮤얼 L. 잭슨 분)와 구스 더 캣이라는 서브 캐릭터들이 오히려 영화에서 가장 생동감 있는 존재감을 발휘했습니다
원더우먼과 비교했을 때 캡틴 마블이 놓친 것
제가 이 영화를 보고 가장 오래 생각한 부분이 바로 이겁니다. 캡틴 마블은 PC(Political Correctness, 정치적 올바름)가 묻어서 별로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는데, 저는 그 시각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PC를 다루는 방식의 완성도가 문제였다고 봅니다. 같은 여성 히어로 서사를 다루면서도 2017년 작 원더우먼이 보여준 결과물과 비교하면 그 차이가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원더우먼은 1900년대 초반이라는 시대적 배경 자체가 강력한 서사 장치였습니다. 성 역할에 대한 당시의 상식이 얼마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는지를 화면 안에서 자연스럽게 보여주면서, 다이애나의 순수한 의문이 오히려 그 상식의 허구성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작동했습니다. 남자 주인공 스티브 트레버는 적대자가 아니라 다이애나를 통해 스스로 용기를 찾아가는 인물로 그려졌고, 그 덕분에 영화는 여성 대 남성의 대립이 아니라 인류 보편의 이야기로 확장될 수 있었습니다.
반면 제가 직접 봐봤는데, 캡틴 마블의 욘-로그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소비됩니다. 그는 캐럴에게 6년간 훈련을 가르친 스승이고, 영화 초반부의 묘사만 봐도 애증으로 엮일 만한 관계입니다. 군인의 시각에서 보면 "감정에 휘둘리지 말라"는 그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닙니다. 실제로 스크롤족(Skrulls)에게 납치되어 포토 캐논이 봉인당했을 때 캐럴이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도 그 훈련 덕분이었으니까요. 스크롤족이란 자신의 외형을 자유자재로 복제할 수 있는 외계 종족으로, 기억까지 스캔하는 능력을 가진 존재입니다. 그런데 후반부에서 욘-로그는 그저 캐럴의 가능성을 억압해 온 또 하나의 남성 인물로 납작하게 처리되고 맙니다. 이 지점이 제 경험상 영화가 가장 아까운 카드를 버리는 순간이었습니다.
캡틴 마블이 하고 싶었던 말은 오히려 너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여성도 할 수 있다, 난민을 혐오해서는 안 된다, 겉모습으로 판단하지 말라. 메시지의 수는 많은데 그것들이 하나의 서사 논리로 모이지 않으니 결국 모든 메시지가 표면만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출처: Metacritic의 평론가 점수도 MCU 평균에 비해 다소 낮게 기록되었는데, 이 간극이 바로 메시지와 완성도 사이의 불균형을 반영한 결과라고 저는 봅니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나쁜 영화라는 뜻은 아닙니다. 욘-로그의 결투 신청을 포격 한 발로 날려버리며 "너에게 나를 증명할 필요는 없다"고 선언하던 캐럴의 그 장면은,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오래 기억하게 된 순간이었습니다. 단지 그 장면 하나가 가진 무게를 영화 전체가 충분히 뒷받침해 주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캡틴 마블, 극장에서 볼 만한가요?
A. 티켓값이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을 정도의 완성도는 갖췄습니다. 적절한 유머와 액션이 있고, 닉 퓨리와 구스 더 캣 같은 서브 캐릭터들이 영화에 활기를 불어넣습니다. 다만 MCU 전체 흐름을 따라가기 위한 맥락 정도로 접근하면 만족도가 더 높을 것 같습니다.
Q. 캡틴 마블과 원더우먼, 어느 쪽이 더 낫나요?
A. 제가 직접 두 영화를 비교해봤는데, 캐릭터 매력과 메시지의 완성도 면에서는 원더우먼이 훨씬 앞선다고 봅니다. 원더우먼은 여성 서사를 인류 보편의 이야기로 확장했고, 남녀 대립이 아닌 연대의 서사로 마무리지은 반면, 캡틴 마블은 전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오히려 하나도 깊이 전달되지 못한 느낌이었습니다.
Q. 캡틴 마블이 MCU에서 왜 중요한 캐릭터인가요?
A. MCU 안에서 바이너리 포스(Binary Force)라는 고유한 에너지 능력을 가진 순수 육체 화력 기준의 히어로는 캡틴 마블이 거의 유일합니다. 바이너리 포스란 캐럴 댄버스가 각성 이후 발휘하는 우주적 규모의 에너지 방출 능력을 가리킵니다. 여기에 더해 어벤져스 엔드게임 이후 MCU 전체 서사를 이끌어갈 리더 포지션을 맡을 것으로 예고되어 있어 장기 계획 면에서는 중요한 캐릭터임이 분명합니다.
Q. 스크롤족이 사실은 피해자라는 반전, 설득력 있게 느껴졌나요?
A. 반전 자체의 아이디어는 흥미로웠습니다. 크리 제국에 의해 행성을 잃고 우주를 떠도는 난민이라는 설정은 현실의 난민 문제와도 닿아 있는 무게감 있는 소재입니다. 다만 스크롤족이 그 이전에 캐럴을 납치하고 닉 퓨리를 위협하는 방식으로 묘사된 터라, 이들을 단순한 피해자로만 그리는 후반부 전환이 다소 급작스럽게 느껴졌습니다.
결론
제가 이 영화를 정리하면서 든 생각은 하나입니다. 캡틴 마블은 분명히 중요한 영화입니다. MCU 최초의 여성 단독 주연 히어로물이라는 위치, 바이너리 포스라는 독보적인 능력, 욘-로그에게 증명을 거부하던 그 장면의 선명함. 이것들은 진짜입니다. 하지만 그 중요성에 걸맞은 깊이를 서사가 따라가지 못했다는 것도 사실이고, 그 점이 계속 마음에 걸립니다.
캡틴 마블 2(The Marvels)가 이미 개봉한 지금, 캐럴 댄버스라는 캐릭터가 앞으로 MCU에서 어떤 리더십을 보여줄지가 오히려 더 궁금해집니다. 첫 번째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MCU 흐름을 따라가기 위해 한 번은 봐두는 것을 권하지만, 큰 감동을 기대하고 보면 원더우먼과 비교하며 아쉬움이 남을 수 있습니다. 제 기준에서는 "꼭 극장에서 봐야 했냐"고 묻는다면, 솔직히 고민하게 되는 영화입니다.